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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2. 12世 〉19. <광양공>암배숙부인성산이씨묘갈명(巖配淑夫人星山李氏墓碣銘)
1. 문헌 목록 〉12. 12世 〉21. <태사공>목사공유성비명(牧使公惟誠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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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태사공>증가선대부휘경효묘갈명(贈嘉善大夫諱景孝墓碣銘)
贈嘉善大夫諱景孝墓碣銘 昔明道歩月坡得安且成三字以後始銘康節今余於公雖銘之未得則猶不銘得文未當則亦猶不銘也公姓趙諱景孝官參奉贈嘉善大夫其先玉川氏麗代光祿大夫門下侍中諱璋爲昉祖是生諱洪珪版圖判書是生諱璵金紫光錄大夫太師特進上柱國檢校門下侍中平章事忠定朝與李公齊賢朴公忠佐侍讀講筵經術懿德爲世師宗即公八世祖也再傳諱淵八本朝吏曹判書至諱膺號伴鷗亭議政府舍人世祖乙亥投紱南下遯于任邑食山村搆小亭于湖浦島與鷀鷗忘機始爲任人遺址尚存行路謳歌諱得才司正諱長孫郡守諱瑀贈司憲府持平寔三世以上也考諱弼字弼之 中廟丁酉成均生員以孫養誠貴覃 恩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妣淑夫人商州周氏父孝欣有壺範宜配君子齊曰貞夫人昌原黃氏男養正養直養誠嘉善同知中樞府事孫男英振玎振璹振養直出珩振瑜振進士同知出餘不錄嗚呼公生于簪纓古家有文有位宜有傳諸後者多矣譜逸生卒而只書墓任實郡大谷里斗峙蚕峰艮坐餘他寥寥無聞是惜也考公之世則文獻之可徵者倘失於穆陵壬辰兵燹歟杞宋之歎豈獨昔日哉公之後孫東錫澤眴將斮石表隧介其族相翼甫訪余於火山願有述微觀相翼之爲人直諒篤於念祖遂不辭叙之如右系以銘之銘曰誕彌世家太師之門珪組相承舍人肖孫橋仰梓俯孝悌爲本何以銘公看山知本過斗阡者宜其必式 檀紀四千三百十五年壬戌五月 日 全州 李亨求 撰 증가선대부휘경효묘갈명(贈嘉善大夫諱景孝墓碣銘) 옛날 명도(明道)선생께서 월파(月坡)땅에 걸으시다가 안차성(安且成) 편안하고 또한 이름 삼자(三字)를 얻은 후에 비로소 강절선생(康節先生)의 갈명(碣銘)을 지으셨다. 이제 내가 공(公)의 묘갈명을 지으나 얻지 못하면 명(銘)을 하지 않은 것만 못하고 얻는다 하여도 적당치 못하면 또한 명을 하지 않은 것만 못할 것이다. 공(公)의 성(姓)은 조씨(趙氏)요 휘(諱)는 경효(景孝)요 벼슬은 참봉(參奉)이니 증가선대부(贈嘉善大夫)이시다. 고려(高麗)때 광록대부 문하시중(光祿大夫門下侍中) 벼슬을 하신 휘(諱) 장(璋)께서 시조(始祖)가 되시며 이분이 휘(諱) 홍규(洪珪)를 낳으시니 벼슬이 판도판서(版圖判書)이시고 이분이 휘(諱) 여(璵)를 낳으시니 벼슬은 금자광록대부태사(金紫光錄大夫太師)이시였다. 상주국검교문하시중평장사(上柱國檢校門下侍中平章事)로 특진(特進)하시였다. 충정왕(忠定王)때에 이공제현(李公齊賢)과 박공충좌(朴公忠佐)와 함께 강연(講筵)에 시독(侍讀)벼슬에 계시니 학덕(學德)이 당세(當世)에 사종(師宗)이시니 바로 공(公)의 팔세조(八世祖)이시다. 이대(二代)를 지나 휘(諱) 연(淵)은 이조(本朝)때 이조판서(吏曹判書)요 휘(諱) 응호반구정(膺號伴鷗亭)은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이셨는데 세조을해년(世祖乙亥年)에 벼슬을 버리시고 임실읍식산촌(任實邑食山村)에 내려와 아담한 정자(亭子)를 호포도(湖浦島)에 세우고 더펄개와 갈매기를 벗삼아 세상(世上)을 잊어 버리시니 비로소 임실(任實)땅 사람이 되시었다. 이제 유지(遺址)가 남아 있으니 길가는 사람도 알고 칭송하는 터이다. 휘(諱) 득재(得才)는 사정(司正)이요 휘(諱) 장손(長孫)은 군수(郡守)요 휘(諱) 우(瑀)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시니 이 세분이 삼세이상(三世以上)이며 고(考)의 휘(諱)는 필(弼)이요 자(字)는 필지(弼之)이시니 중종정유년(中宗丁酉年)에 성균생원(成均生員)되시고 손자양성(孫子養誠)의 귀(貴)로 인하여 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시다. 비(妣) 숙부인(淑夫人)은 상주주씨(尚州周氏)시니 친정아버지는 효흔(孝欣)이신데 귀중(閨中)의 법도 있어 군자(君子)의 배필됨이 마땅하도다. 배는 정부인창원황씨(貞夫人昌原黃氏)이니 아들 양정(養正)과 양직(養直)은 벼슬은 없고 양성(養誠)은 가선대부동지중추(嘉善大夫同知中樞)를 지내시다. 손남(孫男)의 영진 정진 수진(英振玎振璹振)은 양직(養直)의 소출(所出)이요 형진 유진(珩振瑜振)은 진사(進士)니 중추(中樞)의 소출(所出)이라. 여는 다 기록하지 않노라. 슬프다. 공(公)은 벼슬높은 가문(家門)에서 태어나 문학도 있고 작위(爵位)도 있으니 뒷날에 전할만한 일이 많을 것이여 늘 보첩(譜牒)에 생졸(生卒)은 빠지고 다만 묘소가 임실읍 대곡리 두치잠봉(任實邑大谷里斗峙蚕峰) 간좌(艮坐)에 있다 쓰여 있으며 여타(餘他)는 요요하고 적적하여 들림이 없으니 애석하도다. 공(公)의 세대(世代)를 상고해 보면 문헌(文獻)의 증거가 아마도 선조(宣祖) 임진란(壬辰亂)에 유실(遺失)된 것 같도다. 증거될 수 없는 한탄이 어찌 어제 그제일 뿐이겠는가. 공(公)의 후손 동석 택순(東錫澤眴)이 장차 돌을 깎아 무덤길을 표할제 그 일가 상익(相翼) 선비를 소개하여 여중에 있는 나에게 찾아와 갈명을 저술(著述)하여 주길 간청하거늘 가만히 상익(相翼)의 사람됨을 보니 정직하고 단아(端雅)하며 조선(祖先) 생각하는데 독실함으로 사양하지 못하고 우와같이 쓰고 이어서 명(銘)하니 왈(曰) 세가(世家)에 태어나니 태사(太師)의 문이로다. 벼슬이 대대로 이으니 사인(舍人)의 어진 손(孫)이로다. 교(橋)나무는 우러렀고 자(梓)나무는 구부리니 효(孝)와 제(悌)가 근본(根本)이로다. 어떻게 써 공(公)을 명(銘)할고. 산을 보니 나무를 알겠도다. 두치(斗峙)의 무덤길에 지나가는 자 마땅이 반듯이 식할지어다. 檀紀四千三百十五年壬戌五月 日 全州 李亨求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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